그리고 이 질문들은 결국 ‘나’로 돌아온다
퍼블리 창업자 박소령 대표의 "실패를 통과하는 일" 리뷰
퍼블리를 창업하신 박소령 대표님의 “실패를 통과하는 일”이라는 책을 읽었다.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흡입력 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이었다.
특히나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점은 인용된 콘텐츠의 스펙트럼이었다. “슈독” 같은 창업 관련 서적부터, “슈카 코믹스” 같은 유튜브까지, 정말 콘텐츠를 사랑해서 콘텐츠 회사를 창업했다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구절 위주로 인용하며 리뷰를 해보려 한다(단순히 감상만을 늘어놓으면 밋밋하고 지루할 것 같기에 컨셉을 정해봤다). 책 내 본문부터 인용된 다른 콘텐츠의 문구까지, 내가 실제로 읽으면서 그 순간 인상 깊어서 사진 찍어 놓은 부분들만 추려 보았다.
전에는 자세한 내용을 생략해야 사람들이 더 공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제가 더 깊은 속내를 보여줄수록 사람들도 더 깊은 속내를 알게 됐다고 느끼니까요.
그렇게 우리 모두 중요한 무언가를 나누었다고 느끼게 되니까요.
- 테일러 스위프트, <테일러 스위프트>
얼마 전 한 릴스에서 유튜브 채널 중 정보성 채널보다는 브이로그성 채널이 팬층이 훨씬 빠르고 깊게 형성된다는 내용을 보았다.
결국 사람들은 더 개인적이고 깊은, 조금은 부끄러운 내용일지라도 인간적인 면을 느꼈을 때 더 감응하는게 아닌가 싶다.
모두가 공감할 것 같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이야기가 오히려 그런 인간적인 부분을 무디게 만들어 매력을 감퇴시키는게 아닐까.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과학자 9명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201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MIT 명예교수 라이너 바이스와의 인터뷰 제목은 “납득할 수 있는 실패에 도달하라”다. 저자는 실험을 언제 그만 두어야할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
바이스 교수는 “난 왜 이 실험이 성공하지 못하는 지 내 선에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때만 실험을 포기 해요. 그걸 알면 언젠가 그 실험의 한계를 해결할 기술이 생겼을 때 쉽게 알아차릴 수 있죠”라고 답한다. 이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우리는 어차피 실패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절박한 질문은 어떻게 실패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실패를 다룰 것인가, 혹은 실패 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실패를 마주했을 때 패배감은 옆으로 밀어두고 가만히 상황을 살펴본다면 그 잔해에는 반짝거리는 것이 잔뜩 섞여 있다. 그리고 그 일에서 무엇인가를 배웠다면, 그것을 실패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는 아마 우리가 맞닥뜨리는 가장 대표적인 유형의 난제인 것 같다. 나 또한 최근 이런 고민들을 했었기에 이 대목이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 같다.
바이스 교수의 답변은 실험에 관한 내용이지만 이를 좀 일반화 해보자면, 결국 왜 내가 이걸 그만두어야 하는지, 왜 더 나아가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선택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뿐더러, 다시 돌아가야 할 순간이 왔을 때 확신을 가질 수 있으니까.
이런 종류의 고민이 어려운 이유는, 다른 한쪽 선택지의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선택지가 옳은 선택이었는지 아는 방법은, 그냥 선택한 후의 내가 이걸 옳은 선택으로 만들어 내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아닙니다. 강한 자가 어디서 무너지는지, 혹은 행동하는 이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었는지를 지적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모든 명예는 실제로 경기장에 안에서 뛰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얼굴이 먼지와 땀, 피로 얼룩진 채 용감하게 나아가며, 실수를 저지르고, 반복해서 실패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실수와 실패는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예의 주인공은 행동하기 위해 애쓴 사람, 위대한 열정과 위대한 헌신을 알고 있으며 가치 있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불사른 사람, 높은 성취의 승리감을 이해하는 사람, 그리고 최악의 경우 설령 실패한다 하더라도 대담하게 도전하다 실패한 사람입니다. 성공도 패배도 모르는 차갑고 소심한 영혼들과는 결코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 시어도어 루즈벨트(미합중국 제 26대 대통령), 1910년 파리 소르본 대학 연설에서
안전지대에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인사이트로 성공과 실패를 평가만 하기보다는, 직접 손을 더럽히며 리스크를 감수하고, 설령 실패할지라도 행동의 가치를 아는 “경기장 안의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던 어느 날, 샤워를 하다가 이런 생각이 떠 오름. 순응적(reactive) 이 아니라 주도적(proactive)으로 살자. 상대가 친 공을 허겁지겁 따라갈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코트 건너편으로 공을 쳐 보내자.
내가 먼저 움직여야만 이 게임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한참 전에 명함을 받은 사람에게 오랜만에 연락하거나 소개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연락할 때도 일말의 주저함이나 거리낌이 사라짐. 최악의 상황이라 해봐야 거절 회신이 오거나 회신조차 안 오는 것뿐이었음. 거절 회신이 오면 다음을 기약하자며 웃는 얼굴로 답함. 첫 펀드레이징을 하던 2017년의 나와 비교해보면 상전벽해 수준이었음.
난 주로 게임을 할 때는 reactive한 편이다. 내가 먼저 특정한 시퀀스로 상대를 유도하기보다는 상대를 수를 보고 그에 맞게 내가 펼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플레이하는 식으로.
아이러닉하게도 내가 관람을 하거나 응원을 할 때는 proactive한 플레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proactive한 플레이를 지향하지만 통제적이고 리스크에 보수적인 성격이 나를 reactive한 플레이로 물러서게 하는듯하다.
둘 중 뭐가 진짜 나의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주도적으로 내 판을 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야기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내리게 되는 선택’에는 불안감이 없다. 그것이 완벽한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선택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을 통해 객관적으로 손해를 봐도 괜찮다는 너그러운 마음이 받쳐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잘 안 되어도 어쩐지 괜찮을 것 같아, 여전히 다시 이 선택을 내리고 싶어, 같은 마음인 것이다.
- 임경선,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류의 선택. 이성적인 이유와 분석과는 독립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그냥 이게 하고 싶어”라도 날 잡아 당기는 종류의 선택들. 이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겠다는 직감이 드는 선택들. 이런 선택들만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좋아하는 달리기만큼이나 미친 짓도 흔치 않다. 달리기는 고통스럽고 위험한 운동이다. 보상이 적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확실하게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트랙이나 도로를 달릴 때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이런 노력을 충분히 보상해주지 않는다. 오직 달리는 행위 자체가 목적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결승선을 정해주지 않는다. 당신만이 결승선을 정할 수 있다. 혹시라도 당신이 달리는 행위로 기쁨을 얻더라도, 마음으로만 얻을 뿐이다. 당신은 달리기를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당신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 필 나이트, <슈독>
‘달리기’를 창업’으로 바꿔서 한 번 더 읽어 보았다. 인생의 52년을 한 기업에 바친 창업자가 다음 세대를 위해 남긴 충고를, 지금의 나는 믿고 싶다. 나만이 결승선을 정할 수 있다고.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2. 나만이 결승선을 정할 수 있다.
앞으로 뭘하면서 살까 고민할 때 떠올리면 좋을듯 하다.
자신이 사지 않을 것은 팔지 않는다.
존경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사람 밑에서 일하지 않는다.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들하고만 일한다.
- 찰리 멍거, <가난한 찰리의 연감>
심플하지만 강력한 조언이다.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2019년 연말에 시험 삼아 해본 프로모션이 떠올랐고, 2020년 연말에는 여기에 전력 투구해보기로 함. 이유는 앞서 내린 결정들과 같았음.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것들 을 이제는 해봐야 했음.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는 말처럼(아인슈타인의 명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가 말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함) 하던 대로 해서는 회사의 결말이 뻔했기에, 할 수 있는 최대치로 관성을 부쉬야 했음. 프로모션을 위해 추천 받은 마케팅 리더도 모셔옴.
결과의 변화를 원하면서 의외로 그 과정의 변화에 무심한 경우가 많다. 내가 자주 그런다.
“할 수 있는 최대치로 관성을 부순다” 괜히 좀 멋있어 보이는 말이었다.
이 무렵 모 마케터분의 조언이 떠올랐음. 사업하는 데는 복잡한 엑셀이나 데이터 프로그램이 필요한 게 아니고, 정말 중요한 핵심 숫자 몇 개만 대표가 매일 기록해보면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감이 잡힐 거라는 조언이었음. 밑져야 본전이므로, 프로모션을 시작한 12월 1일부터 나도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하나 열어 매일 숫자를 기록하기 시작했음.
2~3일 정도 기록하자 바로 깨달음이 왔음. 아, 이거구나. 한 칸 한 칸 숫자를 입력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그래프를 눈으로만 확인하는 것과는 뇌를 사용하는 부위부터 다른 느낌이었 음. 숫자를 직접 입력하다 보니 매출과 비용, 중요한 지표들이 모두 내 손안에 잡히는 듯했고, 무슨 숫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도 정리되었음.
피터 드러커가 제시하는 벤처 기업의 성공 원칙 네 가지 중 첫 번째는 시장에 초점을 맞추어라’다. 벤처 기업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대부분 예상치 못했던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고객이 예상치 못한 용도로 구매할 때이므로, 이런 것을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발생하면, 분명한 기회로 인식해서 체계적으로 관찰하라고 강조한다.
예상치 못한 이벤트를 체계적으로 관찰하라.
사실 생각해보면 예측 가능한 행동이었으면 시장에서 이미 점유당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다르게 했어야 했나.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내가 하려는 사업에 어떤 사람과 조직이 필요한 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들이다.
나는 어떤 사람과 일할 때 마음이 편안한가?
반대로 어떤 사람과 일할 때 내 마음이 불편한가?
어떤 환경에서 내 퍼포먼스가 극대화되는가, 또는 떨어지는가?
사업 목표를 언제까지 달성하려면 어떤 사람이 필요한가, 그때 조직 구조는 어떠해야 하는가?
내가 원하는 사람의 기준은 무엇인가? 타협할 수 없는 영역은 무엇인가? 만약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그때 사업 목표를 수정할 것인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이 생각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고 수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각의 토대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큰 차이를 만든다. 사람과 조직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얕았고, 사업과 긴밀하게 연결된 조직 계획이 부족했던 것이 많은 문제를 불러왔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결국 ‘나’로 돌아온다. ‘나는 어떤 사람과 어떤 조직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방점은 ‘나’에 찍혀 있다. 그렇기에 이 질문에 답하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이고도 어려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건 결국 실제 경험을 통한 try&error를 통해서만 알 수 있지 않을까. 나 또한 나는 이러한 사람이라고 생각만 하던 부분과 실제 상황에서의 나 간의 차이에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는데, 앞으로는 나에 대해 추론보다는 관찰을 더 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관계에서 핵심은 기대 관리(expectaton management)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합이 잘 맞아 자연스럽게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은 드물다. 서로가 기대하는 바를 명확히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을 때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 같다. 가족 안에서도, 팀 프로젝트에서도,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하물며 큰돈이 걸린 주주와의 관계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되돌아보면, 나는 두 가지 문장을 말하는 데 매우 인색했다. 하나는 “무엇을 원하시나요? 저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나요?”이고, 다른 하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 도와주세요”다.
첫 번째 문장을 많이 썼더라면 주주와 기대치를 조율할 수 있었을 것이고, 두 번째 문장을 많이 썼더라면 주주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들을 빠르게 배웠을 것이다.
특히 주주들과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자주 그리고 계속 파고드는 대화를 많이 할 수록 좋았을 것 같다. ‘5 Whys’라는 방법론이 있듯이 말이다.
“나는 이것을 원해요. 당신은 무엇을 원하시나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그게 왜 중요한가요? 정말 중요한가요?”, “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요?”, “왜 원하지 않나요?”, “정말 안 중요한가요?” 같은 질문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기대치의 접점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서로가 목적을 기반으로 만나는 고용-피고용, 혹은 협업의 관계에서 이러한 대화가 투명하고 솔직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의 기대를 투명히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다면.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Game of Thrones》 시즌 5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존 스노우는 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동료들의 투표로 밤의 경비대 총사령관에 선출된다. 그는 리더로서 조직의 미래를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결정은 자신을 뽑아준 동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만 같다. 고민하던 그는 밤의 경비대 마에스터 아에몬 타르가르옌에게 조언을 구한다.
“지시를 내리면 절반은 등을 돌리겠죠”라고 존 스노우가 말하자, 100년 넘게 살아온 현자 아에몬 타르가르옌은 이렇게 답한다.
그 절반은 이미 자네를 싫어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사령관 노릇을 하면서 즐거운 일은 거의 없을 걸세. 하지만 운이 좋다면 필요한 일을 할 만한 힘을 얻게 될 거야. 소년을 죽이게. 그리고 남자로서 다시 태어나야 하네.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보았다. 빠만 있는 스타는 범부라고, 빠와 까가 둘 다 있어야 진정한 슈퍼스타라고.
7월 말에 끝날 수 있었던 일을 8월 말까지 붙잡게 되면서, 뼈에 사무치게 배운 강렬한 교훈이 있었음. ‘이 일이 잘못될 때 가장 박살 날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내가 직접 달라붙어서 챙기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이었음, 본 계약 체결이 늦어져도, 그래서 내 퇴사가 늦어져도, 애가 타는 건 오로지 나뿐임. 8월 31일에 세금을 내야 하는 건 바로 나니까! 내 인생의 귀한 하루하루가 사라지고 있으니까!
이 깨달음은 여러 상황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칙이었음. 계약서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음. ’이 계약서를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아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손해 보는 사람이 누구지?’ 라는 질문에 답이 나라면, 내가 그 누구보다 눈을 부릅뜨고 한 줄 한 단어 다 체크해야 함. 현금 잔고도 마찬가지임. 현금 잔고 계산에 실수가 생기면 가장 박살 날 사람은 바로 나였음. 그래서 2016년부터 기장 업무를 맡아온 회계사에게 전화를 걸어 맥락을 설명하면서 부탁함. “만약 여기에서 오류가 생겨 현금 잔고에 펑크가 나면 제 개인 돈으로 물어야 해요. 그래서 제가 두 번 세 번 계속 체크하는 것이니, 제발 도와주세요.”
레이 달리오는 책 《원칙》에서 이렇게 썼음.
실패의 결과를 당신이 감당해야 한다면 최종적인 책임 당사자는 당신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질병에 대한 치료 방법을 찾아내는 일을 의사에게 위임할 수 있지만, 의사가 잘못할 경우 그 책임은 당신이 감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을 선택하는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결국 인생이라는 가장 큰 레벨에서 보면 그 누구도 나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주지 않는다. 마지막에 결정을 내리는 것도, 그렇기에 그 결정에 누구보다 신경써야 할 사람은 나다.
찰리 멍거는 《가난한 찰리의 연감》에서 ‘페르시아 전령 증후군’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고대 페르시아인은 전투 패배 같은 나쁜 소식을 갖고 왔다는 이유만으로 전령을 죽였습니다. 전령 입장에서는 임무를 수행하기보다 달아나서 숨는 편이 더 안전했죠. 현명한 상사라면 전자의 경우를 원했을 겁니다. (••) 이런 페르시아 전령 증후군과 그 악영향을 막는 적절한 해결책은 의지력을 발휘해 나쁜 소식을 환영하는 습관을 들이는 겁니다. 버크셔에서는 흔히 이렇게 주문합니다. “나쁜 소식은 항상 즉시 말해주세요. 좋은 소식은 뒤로 미뤄도 좋고요.”
나쁜 소식을 전달하는 것도, 접하는 것도 가능하다면야 회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행동을 요구해야 한다면,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두기보다는 조직의 문화나 시스템을 통해 풀어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을 바꾸기는 정말 어렵다. 그래서 그 배 이상의 유인을 제공하는 문화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연작소설에서 이렇게 쓴다.
“아무튼 모든 격렬한 싸움은 상상력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싸움터죠. 우리는 거기서 이기고, 거기서 패배합니다. 물론 우린 누구나 유한한 존재이고, 결국은 패배하죠. 하지만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이기는 방법보다 패배하는 방법에 따라 최종적인 가치가 정해지는 겁니다.”
모든 생명에는 끝이 있다. 생명체는 아니지만 기업도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사람도, 기업도 ‘죽음’이라는 끝을 향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끝낼 것인가’라는 질문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문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실행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끝내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각오는, 치러야 할 비용까지 감내하겠다는 의미다.
시작하는 것보다는 끝을 내는 데에 더 큰 각오가 필요한 것 같다. 끝나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끝을 내는 것. 이를 위해 필요한 고민과 각오는 시작할 때의 그것에 비할 수 없지 않을까.

